거란 보,기 40만과 신립 보,기 8만의 비교 연구

 거란 보,기 40만과 신립 보,기 8만의 비교 연구


















 거란의 군사제도에 대하여 


서기 1010년 고려거란전쟁 당시 병력 40만이....



===테마 음악==================


https://youtube.com/clip/UgkxW0iADLGdr_4XFxbNvLJcSvEqukAir870?si=QAguIOoP064Pnpx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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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10년 고려거란전쟁 당시 병력 40만이....


을유일에 거란 보,기 40만이 압록강 건너자마자 흥화진 산성을 포위했다가


밤 12시 지나서 병술일 되자마자 잽싸게 거란 성종이 20만만 데리고 근처 통주 철산군의 강조 잡으러 이려 이려 갔는데.




흥화진 산성은 20만이 포위하고, 나머지 20만을 성종이 직접 데리고 아주 빠르게 이려 이려 이려 갔고.




거란 40만을 "보.기步.騎 40만" 이렇게 적는걸로 볼 때, 성종이 20만만 데리고 아주 빠르게 가서 병술일에 알까기 하던 강조,이현운을 바로 초신속으로 


잡아버린걸 볼 때, 


성종이 데리고간 20만은 싸그리 기병이라 봐야한다.




근데 거란의 총 병력은 136만명 정도다.


그리고 거란의 군사 제도는 정군正軍 1명이 전투말을 타고, 그 정군에게 보조파트너(=보인=봉족)가 2명 있는데.


1명은 갈아탈 말을 탄 타초곡하는 놈 1  , 짐말을 타고 이려이려 가는 놈 1 


이렇게 3명이 기본 징집이고 여기에 말 한 마리 당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 1명씩 각각 배정되어줘야하는데.


그래야 이 3명이 군영 떠나서 이려 이려 갈 때, 군영에서 밥 만들고, 군량고 지키고 의류품 창고도 지키고 관리하고 그럴거 아니야.


거란 20만 기병(싸그리 거란인) , 말 관리&군영 지킴이 하인 20만(한족漢族 노예)  이렇게 깔끔하게 되는거지.




강조는 설마 거란 기병 20만이 한 곳만 툭 짚고 어택 땅 찍어서 검차진 바로 파괴해버리고 들어올줄은 몰랐던거같다.




알까기 하며 바둑왕 음양사 놀이 하다가 사로잡힌 강조,이현운.....






이 사례를 통해 알수있는건 고니시 유키나가,소오 요시토시와 기타 고니시 측 장군들과 장교들과 병사들의 고해성사를 통해 임진왜란의 상세한 정보를 파악한 예수회 신부들이 바티칸 예수회 상부에 보고할 임진왜란 보고서를


작성하던 예수회 지부 마카오의 책임자 루이스 프로이스가 적은 '프로이스 일본사(원 제목은 조선 일본 지역 선교 보고서. 그러나 더 정확한 명칭은 '예수회 스파이들의 임진왜란 보고서 정리' 라고 불러야 옳다.)에서 


신립의 병력이 8만이라 나오는 것도 결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


임진왜란 의병장 조경남의 기록인 난중잡록에도 신립 병력 6만이라고 나오고, 다이코기에도 신립 병력이 6~7만이라 나오고.


고니시측 군담물인 소서일행기에도 신립이 서울에서 37500을 데리고 오고, 경기도에서 충주로 집결한게 12500이라고 나옴.  군담물인걸 바탕으로 볼 때 그보다 더 많았을거임. 


선조실록은 무려 신립의 병력이 '10만의 정련된 병력(十萬 精兵)' 이라고 나온다.


앞서 다른 기록들의 6만이나 6~7만이나 8만이란 숫자 언급들로 볼 때 10만을 단순히 많다는 뜻의 수사로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결국 8만 병력이 맞다. 거기서 전투말 탄 정군 1,갈아탈 말 보조파트너 1,짐말 보조파트너 1, 말 관리 하인 3명 


이렇게 착 착 착 나눠야함.




실제로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신립이 서울에서 유성룡한테 8000 장사를 받았는데 이때 신립은 서울 궁궐,내의원,혜민서,전의감에서


활 잘 쏘는 한량인 출신으로 아르바이트 하듯 경비 서는 사람들(=유성룡이 모은 장사 8000)을 싸그리 데리고가고


이들에게 전부 전투말들과 병장기들을 싸그리 지급해줬다. 전투말이 무려 8000마리나 있었다고? 그렇다. 이미 니탕개의 난 무렵에 율곡이이가 모아둔 거다.([율곡전서])


그리고 신립은 서울 인근 고을들을 지나며 거의 병사를 8000을 (또) 모음.


그럼 8000+8000 이렇게 16000이 되는데.


변기는 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으로 조령 지키다가 신립 소환령 듣고 충주로 가고. 


그러면 총합 24000 기마대가 됨. 물론 이중에 전투말 탄 8000 한량나이트만 진짜 기병이라 할수있으니 


신립의 조카이자 양재찰방인 신흠의 눈엔 "애개개 고작 병사가 수천 뿐인데..."로 보였을거임. 


신흠 눈에는 8000 한량나이트 제외한 나머지 타초곡기 8000+짐말기 8000 은 그냥 하인으로 보였을 뿐. 


한량들은 잘 사는 집 자제들이므로 하인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거다.




그리고 이일이 경기도에서 4000 모으고 경상도에서 2000 모으고 얘들을 조령으로 데리고가고 이들은


말 탄 한량들과 하인노비들이었을건데. 이동 속도가 빨랐을거다. 근데 전투말이 아니라서 전투에는


적합하지않았을거다. 하여튼 다 합쳐 3만명이 된다.




근데 서울의 각 관청들에서 노비 37000명 이상 그러니까 대략 4만명이 말 관리는 물론 군영 지킴이 역할까지 하는 


하인으로 뽑혀 검차 혹은 바리케이트 용도로 사용할 수레들을 끌고 한강의 배들에 타서 아주 빠르게 


탄금대 쪽으로 왔을거니 이동 속도나 중간 탈주는 전혀 염려할게 없다.


(선조수정실록 보면 신립이 서울 남자를 거의 전부 다 데려가서 서울을 지킬 남자라곤 4500~7000뿐이란 소리가


나오고 그 서울을 지킬 남자 4500~7000이 노약자,장애인,병자라고 나온다.


걸어다닐줄만 알고 힘만 조금만 있어도 싸그리 데려간 것.


연려실기술 보면 임진왜란 전 서울 평상시 인구가 8만 호라고 나온다. 호는 가구인데. 가구마다 그 가구의 장 즉


성인 남자가 있다. 그러면 총 인구는 40만명인데. 그 중 민방위(잡색군)의 [정군正軍과 보조 파트너인 보인保人들과 남아도는 보조 병력(餘保)으로 편제될 대大한량,소小한량,개인 노비,관아 노비들은 총 8만명이 된다.(세조실록)


근데 이 8만명 중 장애인,노약자,병자 4500~7000 빼고는 싸그리 데려갔다는거니 ......


 




이렇게 되면 무려 7만명이나 되고, 충주 읍민 남녀노소를 모조리 탄금대로 퇴거시켜 시가지를 싹 비워버리면 


8만 이상이 된다.  






이중 한량나이트 8000과 갈아탈 말 탄 타초곡 보조파트너 하인 8000


 그리고 짐말을 탄 하인 8000 이러면 무려 24000 기마대가 되는데. 


그러면 타초곡 기(騎),짐말 기(騎)는 전투력이 어느정도는 있기라도 한가?




실제로 니탕개 난 때 서울의 장교 80명이랑 그들에게 속한 서울의 장사 8000(=한량인)이 이랴 이랴 출격했는데 


이때 지나가는 마을들마다 같은 조선 마을의 쌀들을 약탈하는게 심했다고함.


 왜냐면 말 먹이를 충당을 빨리 빨리 해야되니까. 실로 타초곡 그 자체임.)   




이 정도면 소서행장 18700 병력 중 한 절반은 깎였을 것이다.


실제로 선조실록 보면 그렇게 해석될만한 기록이 있는걸 내가 발견했었음(2년 전에)




신립이 배수진 친 이유는 질거같아서 그런게 아니다.


굳이 산에서 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다만 신립은 일본의 장창이 존나게 길다는걸 몰랐고(이미 귤강광이 암시적으로 말해줬는데도


유성룡과 신립의 대화는 조총 얘기 뿐이었을 뿐 장창의 창 짜도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장창으로 찌를수도있고, 그걸 위에서 후려칠수도 있다는걸 몰랐던거 같고.


설마 소서행장이 조총병을 앞에서가 아니라 


좌군,우군을 포복으로 동東,서西로 전진시켜서 한량나이트 8000+타초곡 8000의 좌우에서 일제히 일어나서 


포화 사격으로 퍼부을줄은 몰랐고,


피난민 수천으로 위장해서 조선계 대마도인들 남녀 특수부대 수천과 가토 기요마사,나베시마 특수부대 2000명이 


들어온줄은 몰랐던거 같다. 결국 이들은 막판 쯤에 한량나이트 8000+타초곡 8000의 후방을 두드려팼을 것이다.


그로 인해 진이 싸그리 와해되고 붕괴....


이래서 전투라는건 재밌는 것이다.




조선은 전쟁을 대비했고, 일본 사무라이 군대를 상대로 대담하게 유인하는 용맹함까지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고니시측 군대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파괴력까지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 조선인들은 일본인들보다 월등히 키가 크니까. 


그 단점을 장창과 조총과 2m 노다치 칼로 어떻게든 커버했다. (어떤 사람은 소서행장이 목책 방어진을 쳤을거라는데. 


그럴 시간적 여유를 신립이 줄리가 없다. 그리고 달천평야에 논밭이 존나 많아서 늪지 역할을 했을거라는데.


당시엔 논밭은 지금보다는 엄청 많이 적었을거다. 탄금대 바로 앞과 충주 읍성 주변으로 논밭들이 깔려있지.


탄금대 앞에서 충주 건국대 캠퍼스인 단월역(충주의 입구)까지 무려 남북 5km인 '달천평야'에는 모래같은 것들이 무수히 깔려있는 들판 '모시래들'이었으므로 그래서 기병의 돌격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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