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스일본사_탄금대 전투 당시 조선군 병력이 총 8만이었다는 사료

탄금대 전투 당시 조선군 병력이 총 8만이었다는 사료



"충주 근처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아고스띠뇨(고니시)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 마을에 도착하자, 역관(경응순)이 약속대로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조선 국왕의 회답 대신 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병력 수에서도 훨씬 우세하였고, 아고스띠뇨의 군대가 도중에 피로를 무릅쓰면서 무리해서 진격해 오기 떄문에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가 너무 크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아고스띠뇨(고니시)는 용감한 지휘관으로서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어 병사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후퇴는 비겁하다. 적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것으로 이는 명백한 패배의 표시이다. 








이미 우리는 커다란 명예와 위신을 걸고 조선인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하였고, 








국왕의 도시인 서울을 얼마 후에 함락시키려고 하는 지금에 이으러 이때까지 승리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가 이 같은 도리를 간결하게 말하자 병사 일동은 그의 설득으로 용기가 북돋았다. 








그곳에서 아고스띠뇨는 병사들에게 전투 대열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게다가 "막상 부딪쳐서는 조선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아무 깃발도 올리지 말고 의기(意氣)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진격시켜라. 추후에 깃발을 일제히 펄럭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명했다.








조선군도 진을 정비하고 달 모양으로 전투 대형을 펼쳤다. 




그들은 적군이 소수인 것을 보자 적진의 중앙을 공격하면서 한 명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양쪽 군대가 이미 접근하였을 때 조선군의 예상은 어긋났다. 깃발들이 펄럭이고 다수의 일본인 병사들이 모습을 나타내고서 조선군의 양쪽 끝을 노리고서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다. 조선군은 그러한 공격에 견딜 수 없게 되어 조금 후퇴하였다가 이내 태세를 가다듬어 한두 번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우 계획적으로 진격하면서 총포에 더하여 대도大刀의 위력으로써 맹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싸움터를 버리고서 발을 날개처럼 하여 앞다투어 도망쳤다. 조선군들은 그곳을 흐르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작은 배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강에는 얕은 여울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조선 병사들은 강으로 익사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8000명에 가까운 적병을 살육하였다.








아고스띠뇨(고니시)의 동생 루이스는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적군의 목을 벤 것은 그가 최초였다. 




전투에 참가했던 몇몇 병사들의 이야기로는 조선군의 하급자 중에는 약간 비겁한 자들이 눈에 띄었으나 




상급자들은 매우 용감무쌍하였다고 한다. 




앞서의 젊은이 루이스는 기마병으로 참가했던 조선군 지휘관 중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생포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것이 명예가 걸린 문제이므로 자신은 풀려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장수는 자신의 목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머리를 자르라는 손짓만 하여 일본인들은 마침내 그의 뜻대로 머리를 베었다.




... 마치 감시인처럼 아고스띠뇨(고니시)의 후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관망하던 아고스띠뇨(고니시)의 숙적인 도라노스케(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부하들의 분전과 용맹함에 감탄하면서 그를 행운아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고니시가 뛰어난 전사로서 빛나는 전과를 올리는 것을 시기하여 자신의 병사들도 부족하나마 제1진 전방 부대의 바로 후위後衛에서 진격하게 해달라고 고니시에게 집요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거절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8만 병력이라고 해서 그 8만 병력이 전부 병사가 아님.


서울과 서울 인근의 활 잘 쏘는 한량들 8000을 싸그리 모아서 전투말에 병장기 싸그리 쥐어주고 


한량들이 각자 거느린 노비들과 서울 관아의 노비들까지 싸그리 징집되고 (유성룡 시무차자보고서 보면 서울 관아 노비 숫자가 37000 이상으로 나오고 선조수정실록 보면 신립이 서울 남자 거의 대부분 데려가서 서울 성벽 지킬 남자 수가 겨우 4500이라고 나옴.


세조실록 보면 서울의 민방위 남자 숫자가 8만명인데. 신립이 이들을 대부분 데려간거. )


그리고 충주 읍민들이 충주 시내 비우고 싸그리 탄금대로 소집되고 


충주 관할 충청도 군현병 8000이 조령 지켜야하는데. 그걸 변기 장군이 신립 소환령 듣고 충주로 철수시킴.


그리고 이일이 경기도,상주 지나면서 모은 4000+2000 병력이 이일을 따라 조령을 거쳐 충주로 옴. 




이일의 상주 전투 패전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를 충주로 유인하기위한 계책이었음이 프로이스 일본사의 조선 사신 경응순 관련 기록으로 다 증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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