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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귤강광과 그 일족을 싸그리 도살한 이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귤강광과 그 일족을 싸그리 도살한 이유 ======테마 음악======================== https://youtu.be/pJjRVuZ3h2U?si=aQZkLv6ym8kTn-5r ===================================== // ============================== 1586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조선에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되어 조선 통신사를 요구했으며, 이 당시의 나이는 50세가 넘어 용모가 크고 수염과 머리털은 반백이었다. 또한 조선의 관·역마다 반드시 가장 좋은 방에 거처하면서 행동이 거만하고 보통 때의 일본 사신과는 아주 달라, 보는 사람이 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상주 목사 송응형(宋應泂)[1]이 베푼 연회에서 기생의 가무가 시작되자  송응형에게 '자신은 전쟁 속에 살면서 수염과 머리털이 희어졌는데, 당신은 기생 속에서 아무 걱정없이 지냈는데도 머리털이 희게 된 이유가 뭐냐'고 비꼬았다. 인동(현 구미시)에서는 백성들을 동원해 창을 잡고 길가에 늘어선 것을 보자 '너희들이 가진 창의 자루가 너무 짧다'고 디스했다. 한양에서 예조 판서가 연 연회장에 후추를 흩어놓자 기생·악공들이 서로 다투어 줍는 소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보더니 '너희 나라는 곧 망하겠구나. 기강이 허물어져서 망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깠다. 일본의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 따지면 부사나 목사 급인데, 도주도 아니고 그 가신이 상주 목사는 물론 예조 판서 앞에서도 조롱으로 일관했으니, 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일본국왕사 명목으로 파견된 이상 조선에서도 얘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사'로 봐야지 '쓰시마 섬의 아전'으로 볼수는 없다. 다만 히데요시가 선정한 특사는 아니고, 쓰시마 도주가 부하중에서 조선사람들이 얼굴을 모르는 자 중에 적당히 선발해서 보낸 것이다. 어차피 히데요시는 조선을 쓰시마의 속국정도로 알고...

상촌집을 보면 이일이 탄금대 전투 선봉이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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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촌집을 보면 이일이 탄금대 전투 선봉이었다고 나온다. (유물 설명 :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1849년, 종이에 채색, 135×101㎝,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4호, 육군박물관 소장. 1587년(선조 20)과 그 이듬해 일어난 녹둔도사건 당시 북병사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 1538~1601)이 이끄는 조선군이 함경도를 침략하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렸다.) 상촌집을 보면 이일(李鎰)이 탄금대 전투 선봉이었다고 나온다. 상촌집의 저자 신흠은 양재역 찰방이고 탄금대 전투에 신립을 따라 종군했다. 이일이 정말 볼 품 없는 패전지장에 불과했다면 신립이 이일의 목을 베거나 곤장으로 후려쳤지. 선봉을 맡기진 않았을거다. [프로이스 일본사]의 기록대로 이일은 상주에서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2만 대군(이일이 모은 4000+2000,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 등 )을  숲 속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그 대피를 용이하게하는 겸, 일본군의 전술이 어떤가를 시험할 목적으로 이일은 상주 농민 800과 서울에서 데리고온 유생,역관 300을  숲의 앞의 북천 시냇가에서 진법 훈련 무료로 시켜줄게 하고 꼬드기며 진법 훈련 시켜주면서 , 농민이 왜군이 다가온다고 보고하면 목을 베어버려서  왜군이 오게 내버려두었다.  이일이 본 왜군은 장창을 안 쓰고 긴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조총을 쏘아대며 상주 농민 800과 서울 유생,역관 300의 두개골을 반으로 가르고  마구잡이로 죽이는 해적 수준의 군대였다. 이일은 이 정도면 실험은 훌륭하다! 하고 바로 튀려고하는데   이일을 따라온 박지,윤섬,이경류 라 하던가 그 세 사람이 바보같이 막 친구들 구하려고 달려드니 끙! 하고 튀었다. 결국 그 셋은 그 자리에서 다 뒤졌다. 한편 숲에 있던 2만 대군은 무사히 약속한대로 숲으로 튀었다. 그리고 이일이 떨구곤 조선 사신 경응순(직업 : 통역관)은 고니시 유...

프로이스일본사_탄금대 전투 당시 조선군 병력이 총 8만이었다는 사료

탄금대 전투 당시 조선군 병력이 총 8만이었다는 사료 "충주 근처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아고스띠뇨(고니시)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 마을에 도착하자, 역관(경응순)이 약속대로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조선 국왕의 회답 대신 최후의 운명을 걸고서 서울로부터 온 8만 명의 군대가 그들을 목표로 출진(出陣)해 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기마병으로서 일본군과의 야전을 치르기 위해 선발된 왕궁의 신분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병력 수에서도 훨씬 우세하였고, 아고스띠뇨의 군대가 도중에 피로를 무릅쓰면서 무리해서 진격해 오기 떄문에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가 너무 크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아고스띠뇨(고니시)는 용감한 지휘관으로서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어 병사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후퇴는 비겁하다. 적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것으로 이는 명백한 패배의 표시이다.  이미 우리는 커다란 명예와 위신을 걸고 조선인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하였고,  국왕의 도시인 서울을 얼마 후에 함락시키려고 하는 지금에 이으러 이때까지 승리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가 이 같은 도리를 간결하게 말하자 병사 일동은 그의 설득으로 용기가 북돋았다.  그곳에서 아고스띠뇨는 병사들에게 전투 대열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게다가 "막상 부딪쳐서는 조선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아무 깃발도 올리지 말고 의기(意氣)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진격시켜라. 추후에 깃발을 일제히 펄럭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명했다. 조선군도 진을 정비하고 달 모양으로 전투 대형을 펼쳤다.  그들은 적군이 소수인 것을 보자 적진의 중앙을 공격하면서 한 명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신립이 조령을 버린 이유 ver 3.0

 신립이 조령을 버린 이유 ver 3.0 ====== https://youtu.be/Q0-lbXz33ns?si=_n_W9waZML8ti0fh ====== 신립이 조령을 버린 이유 상촌집과 프로이스 일본사과 선조실록의 선조와 신하들의 대화를 통틀어 보면 조령 방어방어사이자 조방장인 변기의 충청도군현병 8000과 이일이 어떻게든 경기도 4000 상주와 남쪽에서 끌어모은 피난민 출신 장사들 2~3000을 데리고 뒤편의 자욱한 숲에 진치게해서 언제든지 튈수있게하고 서울 유생들과 역관들과 상주 쓸모없는 백성들 도합 1000명에게 진법 훈련시켜주는척하며 일본군 조총의 사거리와 일본군이 뛰어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후 (이걸 위해 이일은 정찰병을 사용 안하고 멍청한 농민이 보고해 군사의 사기를 흐트릴것같아 바로 목을 베어 죽임) 이일은 이제 볼만큼 다봤다하고 튀는데 같이 온 조정 신하 2명이 쓸데없이 유생들 역관들 백성들 구하려다 조총에 맞아죽음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때 족히 20000이나 되는 조선병들이 뒤편의 숲으로 무사히 달아나는걸 봄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선봉인 1000명의 시신을 보다가 조선의 사신 경응순이 쏘지마시오하며 일본어로 말하며 백기를 들고오자 넌 누구냐 하니 난 조선의 사신입니다 우리 국왕전하께선 신하 3명을 보내어 동맹의 연을 맺어 기꺼이 귀국의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음력 4월 28일까지 충주로 오십시오 하니 소서행장 : 음 날 유인하려는게요? 하자 천만에 말씀입니다 조령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함 그러자 소서행장이 태합 전하께 이를 알리면서도 방심치않겠습니다라고 제법 긴 편지를 보냄 근데 이미 진즉에 행장은 제법 많은 유격대를 조령 중에서도 조선인도 꿈에도 모르는 곳으로 무수히 보냄 그때 가토 기요마사도 지략이 뛰어난 자라서 신립은 필시 충주들판에서 대회전을 치룰 놈같아 내가 먼저 갈거야하며 부하 장수 데리고 2000 정도의 병사 데리고 그 길을 가다가 행장이 보낸 유격대를 만나 이 내가 선봉인데 하며 으르릉대다가 가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