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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전투와 늪지 논밭

  탄금대 전투(=충주 전투) 관련 조선 기록들을 보면 탄금대 앞엔 드넓은 평지가 있고 간간히 물과 풀이 뒤섞여인 땅들이 많고 집들이 많아서 길이 좁다고 말함. 그러나 신립이 드넓은 평지로 끌어들여서 말을 달려 활을 쏘며 돌격하여 짓밟으면 이기지못할리가 없다. 라고 자신감을 드러낸걸 보면 그런 질퍽 질퍽거리는 늪지대만 있는게아니라 말을 제법 달릴수있는 땅도 간간히 있었던거 같음. 지금의 충주를 가보면 탄금대 남쪽으로 남북 5KM의 달천평야가 있고 그 평야 대부분은 논밭으로 도배되어있음. 그러나 당시에도 그렇게 논밭으로 도배되어있었을지는 의문임. 그러나  간간히 물과 풀이 뒤섞여인 땅들이 많고 집들이 많아서 길이 좁다고 언급되어지는걸 보면 그다지 완벽한 평지는 아니었던거같음. 그러나 그런 점이 오히려 조선군에게도 일본군에게도 장점이 될수도 약점이 될수도 있다고 볼수있겠음. 일본군은 조총을 쏘지만 조총 유효 사거리는 50M인 반면 조선군은 말 위에 탄 채로 활을 쏘고 빠르게 이동할수있으니 늪지에서 질퍽질퍽거리지만 않으면 오히려 일본군에게 불리한 땅이라고 볼수도 있겠음.  '요시츠네 영웅전'이란 게임을 해보면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기병들 데리고 우지 강 늪지대에서 '타이라'와 싸우는게 나오는데. 전장이 평지와 늪지가 간간히 뒤섞여있음. 그래서 말 타고 이랴이랴 달리다가도 늪지에서 질퍽질퍽거리게 되고 매우 짜증나는 전장임. 임진왜란 당시 충주 전투도 아마 그렇게 전개되었을거같음. 그렇다면 신립은 왜 엄청나게 참패를 당했는가 그건 징비록에도,선조실록에도,선조수정실록에도, 프로이스일본사에도 나오지만, 전투가 개시되던 때는 음력 4월 28일 정오인데. 이미 그 전날 새벽에 일본군 선봉대가 충주로 잠입해 들어옴. 신립은 정찰병을 전혀 운용 안했고, 부하 병사가 일본군이 이미 충주로 잠입해 들어왔다고 보고하자 놀라서 뛰쳐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오고선 보고한 부하 병사의 수급을 칼로 촥 베어버림. 그 때문에 전투가 시작될 때에 , 신립은 고니시 유키나...

신립과 문경새재

  임진왜란 당시 문경엔 저런 오늘날의 '문경새재' 즉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관문을 갖춘 일자형 성벽이 없었음.  그냥 문경읍성만 있었음.   새재란 말 자체가 한자로 '조령(鳥嶺)'임.   문경은 조령으로 가는 첫 관문이고,  조령은 충주에서 문경 사이에 있는 험준한 산골짜기들임.  충주에서 문경까지 '조령 대로'라는게 있는데. 산골짜기로 위태 위태하게 매우 험준한 길 하나가 딱 있음.  그 길로 조선통신사,왜국 사신이 왕래함.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길을 따라 왔는데.  조령엔 그 것만 길이 있는게 아니고 다양한 샛길들이 있음.  당시 조선은 그 샛길들을 정확히 어디 어디를 막아야할지 제대로 파악 못하고있었는데.  충주 사람들은 그걸 잘 알고있었음. 

신립이 데리고 간 병사의 수

신립이 데리고간 병사는 실제 정규군이 아니라(실록에 보면 홍여순이 신립에게 준 병사들은 정규군이 하나도 없었고 성인식도  못 치른 애들이었다고 나옴.)  활을 잘 쏘는 서울과 서울 인근의 한량 8천명인데.  어떤 한량들은 궁궐 경비를 서는 무사,재관으로 활동하기도했고, 어떤 한량들은 삼의사 각 관청의 경비를 서거나, 의원으로 활동하고있었던듯한데. (군역 탈피 할려고 내의원,혜민서,전의감에 이름만 올려놓고, 집에서 놀고있는 한량들이 많았다는게 실록에 나옴.)  얘들을 8천명 박박 긁어모아서 데리고간건데.  충청도 군현들에서도 8천명이 조령으로 집결했다가 신립의 소환령을 받고  충주로 집결함.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한 후 패잔병을 얼마나 데리고왔는지 모르겠지만  상주 전투 당시 이일의 병력이 4000~6000인 것과 상주전투 때 죽은 조선군은 1천명 정도인걸 감안하면 2000~3000명 정도의 패잔병이 조령을 거쳐 충주로 왔을수있음.  이렇게 하면 전투병이 1만6000+3000명인데.  일본 에도시대 군기물 '소서일행기'를 보면 신립이 서울에서 데리고온건 37500이고 경기도에서 충주로 보낸 군사는 12500이라고 나옴.  비록 군기물이지만 간단히 무시할 수 없어보임.  프로이스일본사엔 충주 조선군이 8만이라 나오고,  다이코기엔 6~7만. 조선의 난중잡록엔 6만명이라 나오는데. 병력수가 지나치게 많게 기록되어있다는 것들이 공통점임.  이건 왜 이런 것일까?  임진왜란이 한창 중이던 시기,  유성룡이 선조에게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군인 숫자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고있는걸 보고한 '시무차자'를 보면 당시 서울에는 37000명 이상의 노비들이 각 관청에 일을 했다고 나옴.  신립이 서울에서 한량들 8000명을 데리고 올 때  한량들이 각자 거느린 개인 노비들 혹은 관청 노비들이 붙여져서  노비들이 한량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