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탄금대 전투 군사수 계산

 신립 탄금대 전투 군사수 계산 



전쟁 대비 못해서


군역 제도가 이상해서 


그래서 평야 대회전이 겨우 수천+수천의 군대로 졸속으로...


근데 제대로만 하면 우리가 쪽바리 이기고 쳐밟아버려 후후 


이러면서 두정갑,간주 투구,첨주 투구 뽕 쳐빨아재꼈는데


그걸 싸그리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거든.




그리고 그걸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너무 비참해지지




근데 지들도 알아

















//신립의 병력 = 한량나이트 8000 병사 , 갈아탈 말을 탄 보조파트너 8000 , 짐말을 탄 보조 파트너 8000 , 


      말 관리하는 하인 8000+8000


한량나이트 8000이면 임용한 말대로 거기에 갈아탈 말을 타는 하인 1 , 짐말을 타는  하인 1 


그리고 말 관리하는 하인 2명 이게 기본인데.


벌써 이렇게만 해도 총 4만 병력이 되잖아


근데 어떻게 8000+8000 뿐이겠네 이 등신새꺄 ? 쯧 




//이일의 병력 4000 병사+2000 병사 


 추가 DLC 이일의 실험용 고기 방패 : 서울 유생 역관 300(금군 복장을 입고있음. 상주 전투 때 왜군의 성능 실험 피해 대상 됨.) + 상주 시민 800(상주 전투 때 왜군의 성능 실험 대상이 됨.)




게다가 이일이 서울에서 장교 40+20명 모으고 유생,역관 300 모으고 


경기도에서 장교 40이 지휘할 4000 병사모으고 경상도로 가서 장교 20이 지휘할 2000 병사 모으고 


상주에서 추가로 또 상주시민 800을 얻고 


그리고 상주 북천 시냇가엔 상주 시민 800 이랑 서울 유생,역관 300(금군 복장들을 입고있어서 딱 왜군에게


어그로가 착착 끌림. 이일이 일부러 노림) 탁 두고 무료국비지원진법훈련 시켜주면서 


뒤의 산 위의 숲 앞에는 자기가 모은 4000+2000을 두고. 




//변기의 병력 : 충청도 관할 충주 군현병 8000


그리고 그 때 조방장 겸 방어사인 변기가 


조령 지키다말고 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을 데리고 이일을 도와주러 와서 바로 그 숲 앞에 차라락 포진함.


(선조실록)


이일,변기가 뭘 해야할지는 둘 다 이미 알고 있고 사전에 약속되어있는데


상주 시민 800 이랑 서울 유생,역관 300만 그걸 모르고있음.


지금 이일은 일본군이 어떻게 교전하나를 보고 충주 달천평야로 일본군을 끌어들일지 말아야할지를 결정해야하는거야 그거만 확인하면 소중한 경기도,경상도 병력 4000+2000 (상촌집,선조수정실록) , 변기의 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은 바로 숲 쪽으로 빼버리고 (프로이스 일본사)


유생,역관 300,상주 시민 800은 썰려 뒤지고 총 맞아 뒤지게 내버려둬 


근데 이일과 함께 이경류,박지,윤섬이 와있었는데. 이경류는 변기의 부관이고 


박지,윤섬은 조선 국왕을 평소 모시는 자들임




[서기 1592 임진년 음력 4월 25일.] 이일은 백성이 와서 "왜군이 온다"고 보고하자 


바로 목을 날려버려. 군심이 흐트러지는 것보다도


지금 들판의 중요한 실험을 이 무지랭이백성놈이 방해하고있거든. 


과연 왜군이 스르릉 왔는데도 이일은 모른 척하고 계속 진법 훈련시켜주고 


군사들도 그걸 보면서도 아무도 말 못하고 덜덜 거리고만있음.


그때 일본군이 히히히하며 와서 조총 쏘고 2M 긴 칼 노다치 마구 마구 휘두르자 아주 상주 시민 800,서울 유생 역관 300이 대학살을 당함. 그때 이일은 바로 내빼서 숲에 진 친 4000+2000과 변기의 군현병 8000은 바로 숲 속으로


들어가버림.  14000명인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눈깔엔 2만명 정도로 보였다. (프로이스 일본사 상주 전투 기록)


14000... 20000 ... 6000명의 차이가 난다. 6000은 뭘까? 아마 조령으로 가려는 경상도쪽 피난민들일 수 있다. 




이경류,박지,윤섬은 북천 시냇가의 백성들이 살육당하는걸 보고 피가 거꾸로 치솟아서 돌격해 구하려다가 


조총 벌집이 되어서 죽어버려. 


이일이 본 일본군은 장창도 안 쓰는 그저 해적 수준의 왜구들이었음. 이일은 안도하면서 이랴 이랴 갔을 것이고...


그리고 이일은 한 사람을 떨구고 가는걸 절대로 잊지않음.


그게 바로 통역관이면서 조선의 사신인 '경응순'임.


경응순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잡힘. 경응순은 쏘지마시오 이러면서 "우리 국왕의 전갈을 전하러 왔습니다.


우리 국왕께선 대신 3명을 충주로 보내서 음력 4월 28일에 장군을 충주에서 만나 항복 조인식을 하려고합니다."라고 


말함. 


고니시는 그걸 믿어주는 척하며 바로 히데요시한테 상주 전투의 승전 소식과 조선측이 음력 4월 28일에 충주에서 


강화회담을 제안했다는걸 전하고, 자신은 놈들이 통수 칠거에 대비해서 미리 선봉 부대를 보냈다고 말함. 


그 미리 보낸 선봉 부대는 아마 피난민 6000일거임. 자연히 뒤따라 가게되는거지.


아마 조선계 대마도의 남녀들일건데. 왜구를 따라 대마도로 갔던 조선 사람들일거고 평소 조선 왕이 임명한 사또의 


탐관오리질에 시달리는데. 조선 태종이 정하고 세종이 아름답다고 칭찬한 그 백성이 사또를 고소못하게 금지한 그


쓰레기같은 악법의 피해자들일거고 그들은 조선에 복수를 원했을거고 이 임무에 흔쾌히 자원했을거같다.




한편 이일,변기의 14000 연합군은 이미 진즉에 약속되었던 신립의 소환령에 따라 조령을 지나 충주로 향했다. 






실제로 음력 4월 27일 새벽에 많은 일본군이 이미 충주에 들어왔고, 그걸 정찰병이 신립에게 보고했고


신립은 제대로 잠도 못 자지만 약간 자며 짜증과 스트레스 긴장으로 있던 도중에 급히  뭐!하며 급히  나갔다가 씩씩 거리며 돌아와서 정찰병의 목을 날려버렸다고 나온다.


아마 피난민 6000으로 위장한 그 자들은 밤 중을 틈타 어디론가 움직였다가 정찰병에게 발각되었고 


정찰병이 그걸 보고 했고 신립이 뛰쳐가서 봤더니, 이 곳도 안전하지못할거같습니다유 무서워서 딴 곳으로


가려고했습니다유 죄송합니다유 하자 마음씨 착한(?) 신립은 그 말을 믿고 그들보고 어서 빨리 탄금대로 가시오라고


말한 후 소중한 자기 잠을 깨운 혹은 자신을 놀라게한 정찰병의 목을 바로 베어버려서 , 군심이 어지러워지는 것도


방지하고 자기 짜증 스트레스도 푼 듯하다. 기록들을 보면 이렇게 촤라락 알 수 있어.






 


//프로이스 일본사의 신뢰성과 다른 기록들과의 교차 비교


루이스 프로이스가 쓸 ['예수회 일본 조선 지역 선교 보고서(='프로이스 일본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에 필요한 자료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고니시 측 왜성에 가서 고니시 유키나가, 소오 요시토시, 장교들,병사들이랑 만나고 




그들의 고해성사를 받아주고, 세례를 베풀고, 얘기하는 과정에서 얻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프로이스 일본사 보면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한테 보낸 보고서들도 적혀있고, 내용이 정말 풍부하다. 




부산진성,동래성 함락 과정과 상주 전투에 대한 내용도 상세하다. 프로이스가 굳이 조선에 갈 필요가 없다는건 




이미 말했으니 내가 2번 더 반복해 말할 필요가 없다. 유성룡은 전투 현장에 가기는 커녕 도망다니기 바뻤고 




유성룡의 징비록 탄금대 전투에 대한 기록은 프로이스 일본사의 발톱의 때만큼이나 빈약하다








게다가 프로이스 일본사만 신립의 병력이 80000이란 소리를 하는거면 모르겠는데. 




다른 기록들도 비슷한 소리들을 하고있잖아.




또 말하랴?








임진왜란 의병장 조경남의 기록인 난중잡록에도 신립 병력 6만이라고 나오고, 다이코기에도 신립 병력이 6~7만이라 나오고.




고니시측 군담물인 소서일행기에도 신립이 서울에서 37500을 데리고 오고, 경기도에서 충주로 집결한게 12500이라고 나옴.  군담물인걸 바탕으로 볼 때 그보다 더 많았을거임. 




선조실록은 무려 신립의 병력이 '10만의 정련된 병력(十萬 精兵)' 이라고 나온다.




앞서 다른 기록들의 6만이나 6~7만이나 8만이란 숫자 언급들로 볼 때 10만을 단순히 많다는 뜻의 수사로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서울의 민방위(잡색군) 남자를 거의 대부분 데려간 신립


연려실기술 보면 임진왜란 전 서울 평상시 인구가 8만 호라고 나온다. 호는 가구인데. 가구마다 그 가구의 장 즉




성인 남자가 있다. 그러면 총 인구는 40만명인데. 그 중 민방위(잡색군)의 [정군正軍과 보조 파트너인 보인保人들과 남아도는 보조 병력(餘保)으로 편제될 대大한량,소小한량,개인 노비,관아 노비들은 총 8만명이 된다.(세조실록)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보면 신립,이일이 서울 남자를 거의 전부 다 데려가서 서울을 지킬 남자라곤


 4500의 남자들과 성벽 쪽에 붙어있는 궁가(弓家)에 있는 노약자,장애인,병자 7000이 다라고 나온다.




걸어다닐줄만 알고 힘만 조금만 있어도 싸그리 데려간 것.




근데 이 8만명 중 장애인,노약자,병자 4500~7000 빼고는 싸그리 데려갔다는거니 ......




자 일단 8만명에서 노약자 장애인 병자 7000을 빼서 서울 성벽의 궁가(弓家)들에 남겨두자. 


그러면 대략 7만명 남는다.


이일이 4000 병사를 빼서 데리고 간다.


그러면 서울 민방위(잡색군) 남자는 69000 남는다.




서애 유성룡 시무차자보고서(서애집)를 보면 임진왜란 직전 서울의 각 관청의 노비가 37000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나온다.


고로 서울의 각 관청의 노비들 4만명도 동원한다. 어디에 동원할까. 


충주 탄금대 쪽에 군영을 설치하고 이들을 말 관리 & 군영을 지키는 하인들로 삼는다.


진짜 황산벌 전투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거같으니 계백의 결사대가 어찌 겨우 5000이랴? 


왠지 신라군보다 더 많았을듯하다. 


그러면 서울 민방위(잡색군) 남자는 29000명 남는다. 




그렇다면 자..., 신립이 한량나이트 8000 을 서울에서 데려갈 때에 갈아탈 말을 탄 보조파트너 8000 , 


짐말을 탄 보조파트너 8000도 데려가는데.


 일단 이렇게만 해도 다 합쳐서 24000명인데. 


한량들은 귀족들의 자제들이니 이 하인들을 구하는건 그냥 지들 집 개인노비들 사용하면 되고 또 서로


친한 사이니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마치 자기가 키우는 개 데리고가는 것처럼


주인과 개가 서로 친했다면 주인이 가는데 개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서울 민방위(잡색군) 남자는 5000명 남는다. 이들은 그냥 남겨둬서 서울을 지키게한다. 


5000 정도는 서울에 있어야지.


그러면 신립은 64000을 이일은 4000을 다 합쳐 68000명이 충주로 향한 것이다.


이일은 경상도로 내려가서 장사 2000을 추가로 거둔후 합치고 조령으로 가서 변기의 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


과 함께 신립의 소환령에 따라 충주로 왔다.


그러면 68000+10000 = 78000 이 된다. 딱! 2000의 오차를 남겨두고 8만이 된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한량나이트 8000만이 진정한 병사이고 나머지는 그냥 하인으로 봐야한다.


(그래서 신립의 조카이자 양재역 찰방이자 신릅을 따라 탄금대 전투에 참가한 참가자인 신흠이 적은 상촌집을 보면 


이일을 선봉으로 맡기기 전, 충주에 막 도착한  신립의 전투병 숫자는 거의 수천이었다고 나온다. 즉 8000이란 얘기. 


그리고 보조파트너 역시 말을 탔으니 일종의 기병이라고 할수도있으니(거란의 전투말 탄 정군正軍의 보조파트너인 타초곡 기騎 느낌.)  한량나이트건 보조파트너건 말 관리하는 하인이 말 탄 사람 하나당 3~4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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