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집을 보면 이일이 탄금대 전투 선봉이었다고 나온다.

 상촌집을 보면 이일이 탄금대 전투 선봉이었다고 나온다.




(유물 설명 :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1849년, 종이에 채색, 135×101㎝,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4호, 육군박물관 소장. 1587년(선조 20)과 그 이듬해 일어난 녹둔도사건 당시 북병사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 1538~1601)이 이끄는 조선군이 함경도를 침략하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렸다.)







상촌집을 보면 이일(李鎰)이 탄금대 전투 선봉이었다고 나온다.


상촌집의 저자 신흠은 양재역 찰방이고 탄금대 전투에 신립을 따라 종군했다.




이일이 정말 볼 품 없는 패전지장에 불과했다면 신립이 이일의 목을 베거나 곤장으로 후려쳤지.


선봉을 맡기진 않았을거다.




[프로이스 일본사]의 기록대로 이일은 상주에서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2만 대군(이일이 모은 4000+2000,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 등 )을 


숲 속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그 대피를 용이하게하는 겸, 일본군의 전술이 어떤가를 시험할 목적으로 이일은 상주 농민 800과 서울에서 데리고온 유생,역관 300을 


숲의 앞의 북천 시냇가에서 진법 훈련 무료로 시켜줄게 하고 꼬드기며 진법 훈련 시켜주면서 , 농민이 왜군이 다가온다고 보고하면 목을 베어버려서 


왜군이 오게 내버려두었다. 


이일이 본 왜군은 장창을 안 쓰고 긴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조총을 쏘아대며 상주 농민 800과 서울 유생,역관 300의 두개골을 반으로 가르고 


마구잡이로 죽이는 해적 수준의 군대였다. 이일은 이 정도면 실험은 훌륭하다! 하고 바로 튀려고하는데  


이일을 따라온 박지,윤섬,이경류 라 하던가 그 세 사람이 바보같이 막 친구들 구하려고 달려드니 끙! 하고 튀었다. 결국 그 셋은 그 자리에서 다 뒤졌다.


한편 숲에 있던 2만 대군은 무사히 약속한대로 숲으로 튀었다.


그리고 이일이 떨구곤 조선 사신 경응순(직업 : 통역관)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조선 왕의 전갈이라면서 조선 날짜 음력 4월 28일에 충주에서 3명의 대신이 와서 


항복할테니 그 날짜에 충주로 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니시 유키나가가 약속된 날짜에 충주에 가보니 조선의 대신 3명이나 경응순은 전혀 보이지 않고 


조선의 8만 병력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있는 것이다. 속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 8만 병력( 한량 8000 + 보조 파트너 16000 + 서울 각 관청 노비 37000 , 이일 4000+2000 , 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 등 ) 


중 8천 이상의 병사는 전부 전투말을 탄 한량나이트 였다. 


(당시 신립은 서울에서 활 잘 쏘는 한량(귀족 자제들)으로 서울 궁궐이랑 내의원 혜민서 전의감에서 경비를 서던 자들을 전투말 , 투구 , 갑옷 , 병장기 모조리 


차려입혀서 데리고 왔다. 이들을 지휘하는 장교들은 80명이고 장교들도 , 한량들도 전부 유성룡이 미리 모아둔 용사들이었고 정규군이 아니라


조선 왕 선조가 유사시를 대비해 사냥을 빙자해 비밀리에 기른 최정예 부대로 역대 중국 대륙과 삼한의 천자들과 제후들은 사냥을 빙자해 한량들을 비밀 부대로 길렀다.  그 유서깊은 전통을 조선 왕 선조도 쓴 것이다.


그리고 8천의 한량나이트들은 잘 사는 귀족 자제들이라서 개인 노비들을 데리고있고 한 사람 당 개인 노비 2명을 보조 파트너로 삼아 


조정에서 준 전투말에 개인적으로 짐말이나 갈아탈 말도 가지고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량 한 사람 당 말이 3필이 된다. 어쩌면 조정에서 따로 보조 파트너를


서울 인근 고을들과 충주 고을들에 할당시켜서 유사시 비상 소집이 빨리 빨리 되도록 했을수도 있다.


거의 기마민족 거란의 [ 전투말 탄 정군正軍 1명 곱하기 보조 파트너 2인(타초곡 기병 1  물품 관리 운반 담당&병영 지킴이 1)과 추가 말 2마리]


법칙이 8천의 한량나이트들에게도 적용된 것이리라.




조선왕조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유성룡이 신립에게 별도로 모집해둔 장사 8000을 주었다. 그리고 신립은 서울 인근 고을들을 돌며 거의 8000의 병사를 (추가로) 


 모았다. 징비록,서애집,조야기문을 보면 충청도 조령을 수비하고있던 변기는 신립의 소환령을 듣고 충청도 충주 관할 군현병 8000을 데리고 이일과 함께 충주로 왔다. 변기와 함께 온 이일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있었다. 상촌집,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4000+2000 이다. 


그러면 총합해 3만 병사가 된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신립이 서울의 남자 거의 대부분을 끌고와서 서울의 성벽을 지킬 병사라곤 4500이 전부였다고 나온다.


세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보면 임진왜란 전 서울의 평상시 인구는 8만 가구다. 그러면 대략 40만명의 남녀들인데. 서울과 서울 인근의 고을들을 다 합친 


인구수일 것이다. 세조는 서울은 서울대로 잡색군(민방위)을 편성했는데 잡색군의 병력을 한 가구 당 하나씩 징병했는데


그 수가 8만명이고 이 8만은 한량과 노비로 구성된 자들이었고 


유성룡의 시무차자보고서(서애집에 있음)를 보면 임진왜란 전 조선의 제색군諸色軍(민방위가 아닌 정규군)은 정군이 8만 정도. 보조파트너가 10만 정도.


다 합쳐서 17~18만 정도(수군도 포함되어있음.)인데. 여기에 타색군他色軍(다른 종류의 군대)은 포함 안되어있다고 나온다.


유성룡은 ['다른 종류의 군대'의 숫자]에 대해선 일부러 언급을 안하고 있는거 같고.... 


그리고 유성룡은 임진왜란 전 서울의 평상시 각 관청 노비 숫자가 37000 이상임을 추가로 언급하고있다.(시무차자보고서)




난중잡록을 보면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의 병력이 6만으로 나오고, 다이코기엔 6~7만. 


프로이스 일본사엔 8만. 


선조실록엔 무려 10만명으로 적혀있다. (탄금대 전투 전 충주 읍을 싸그리 비워서 탄금대 쪽으로 소집시키면 10만이란 숫자도 결코 불가능한 숫자는 아닌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측 병사들의 군담을 통해 작성되었을수도있다는 에도 시대 군담물 '소서일행기'는 적기를, 신립이 서울에서 데려온게 37500 이고 


경기도 쪽에서 충주로 모인게 12500이라고 나온다. 그럼 도합 5만인데.  군담물인걸 감안할 때 5만보다 더 이상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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